지속가능한 구조를 위한 작은 움직임 수줍게 고백하자면, 2009년 처음 트위터를 시작한 나는 ‘파워’트위터리안은 아니지만, 여전히 틈만 나면 타임라인을 확인하는 ‘헤비’트위터리안이다. 2010년 쓴 한 글에서 “무수히 많은 ‘재잘거림tweet’으로 흩어지는” 트위터를 “거대 담론을 향한 ‘이성의 목소리’에 대항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틈새의 목소리”로 예찬했던 생각 역시 변함없다.1) 물론 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신문이나 방송, 주요 포털사이트의 컨텐츠를 이용하고 신뢰하며 나 역시도 일면 그러하지만, 기존 미디어가 다룰 수 없거나 미처 다루지 못하는 중요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트위터에서 접할 수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우리 미술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젊은 작가들의 신생공간과 그들의 활동에서 나는 이러한 트위터와의 유사점들을 발견하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미술계의 주된 흐름과는 거리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으며 그 누가 권유한 적도 없지만, 오직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의미 있고 즐거운 재잘거림 때문에 한 번 그 맛을 알고 나면 관심을 거둘 수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실상 트위터는 이들 신생공간의 예술활동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들은 현실공간을 구축하기 전에 먼저 해당 공간의 명칭과 로고의 디자인을 확정해 SNS 계정을 만들고 본인 계정 상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홍보를 시작한다. 그리고 현실공간에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SNS를 가장 중요한 (혹은 유일한) 홍보 창구로 이용할 뿐더러,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만큼이나 SNS에 사진과 코멘트를 올려 다른 사람들과 피드백을 나누는 일을 중시한다. 스마트폰 덕분에 이러한 활동은 컴퓨터 없이도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진다.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전시를 비롯한 모든 프로젝트의 정보를 얻는 것도, 해당 프로젝트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자신이 다녀온 프로젝트에 짧은 감상평을 게시하고 다른 사람의 평을 읽으면서 소통하는 것도 모두 가상공간을 플랫폼으로 이루어진다. 또 스마트폰 지도 어플을 켜고 후미진 곳에 위치한 신생공간을 찾아가는 일을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으로 받아들인다. SNS와 인터넷, 그리고 그러한 가상공간에서의 활동에 이동성을 부여하는 스마트폰은 이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인 셈이다. 이처럼 가상공간이 신생공간의 주요한 플랫폼으로 활용되는 것은 그들의 생성 배경과 본질적인 특성, 그리고 그곳을 운영하는 주체들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신생공간 운영의 주체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미술대학을 졸업한 개인전 3회 미만의 30대 초반 (1980년대 중반생) 작가들이다. 이들 대부분 10대 시절 IMF를 맞았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2000년대 중반 미술계 호황을 소문으로만 듣다가, 졸업을 하고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술시장은 크게 위축되었고, 신진작가의 등용을 도왔던 대안공간들도 대부분 사라지거나 공간의 성격을 변경하였고, 주요한 공적자금이었던 문예진흥기금마저 고갈 위기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가능한 모든 공모에 지원해보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그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바늘구멍 같은 기회를 마냥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를 택했다. 그렇게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 공간을 만들어 자신과 같은 입장의 작가들과 기회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러한 필연적 우연으로 대거 생겨난 신생공간의 운영자 대부분은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와 예술 활동을 병행하는 가운데 각자의 역량 안에서 공간을 운영한다. 따라서 전시공간은 작업실을 겸하거나 대부분 낙후된 지역에 협소한 공간을 한시적으로 점유하고 있고, 공간 운영자는 작가로서의 ‘생산’ 외에 기획, 재원충당, 섭외, 홍보, 설치, 운영 등 ‘매개’의 역할까지 도맡아 할 수밖에 없다. ‘가용 범위’ 안에서 ‘초경량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따로 홍보를 위해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는 SNS를 활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신생공간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별다른 후원 없이 각자 개인들의 가용 범위 안에서 공간을 운영하기 때문에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간의 존폐 여부를 후원자가 아닌 본인이 결정할 수 있고, 후원자의 눈치를 보면서 공간의 성격을 조율할 필요도 없다. 몸집이 가볍고 공간과 장소 자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유연하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속이 용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둘째는 이들에게 중요한 기준이 ‘외부의 판단’보다는 ‘자기 충족’이라는 점이다. 그들 대부분이 제도의 승인 이전에 동료의 승인에 만족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을 기준으로 행복을 판단한다.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재미난 일을 기획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서 원하는 성과가 나오면 즐겁고 주변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기쁘다. 이렇듯 주어진 조건 하에 본인의 성취 자체에 충실한 이들의 활동에서 기존에 볼 수 없던 가볍고 유동적인 새로운 결과물들이 이미 생산되고 있다.2) 요컨대, 이들 신생공간은 큰 펀치 한 방은 없지만 상대의 펀치 한 방에 날아갈 일도 없고, 협소할지언정 초라하지 않으며 돈은 없지만 자부심과 즐거움이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신생공간의 자생적 움직임이 하나로 집결되어 <굿-즈>라는 최초의 결과물로 가시화되기 직전이다. 물론 공간을 운영하는 작가들은 지금까지 줄곧 다른 신생공간에서 열리는 행사에 수시로 관객으로 참여하고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등 느슨하고 자유로운 연대를 형성해 왔다. 대외적으로도 2014년 말 신생공간 운영자들을 패널로 한 좌담회가 열려 주목받은 바 있으며, 최근에는 주요 미술잡지에서도 이들 신생공간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다.3) 그러나 어떠한 담론을 형성하는데 대상으로 지목되거나 외부의 시선에 의해 노출된 것이 아닌, 비슷한 생각과 절박함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작가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오랜 준비 끝에 그 모습을 드러낸 행사는 <굿-즈>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굿-즈>는 총 15개의 공간과 6명의 작가/기획자가 주축이 되어 행사를 기획하고4), 총 80여 명의 작가가 총 250여 종, 1,500여 점의 미술작품 및 작업의 파생물을 선보이게 될 판매 행사다. 상봉동 ‘반지하’ 내 ‘굿즈’에서 소규모로 유사한 형태의 시험적 판매가 이루어진 바 있지만5), 비슷한 시기 생겨난 유사한 성격의 신생공간과 그곳을(에) 운영(참여)하는 작가들 모두 새로운 시장에 대한 필요성에 절대적으로 공감하였기에 대규모 행사로 촉발된 것이다. 그들의 공감대는 신생공간이 작가들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작업’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판매’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재정적 ‘지원’을 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극복해보자는데 모아졌다. 요컨대 <굿-즈>는 신생공간이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겨난 것에 그치지 않고 자력으로 생존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생’을 위한 하나의 방편을 마련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공간을 만들 때처럼 모든 과정은 오직 작가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초경량체제 아래 전시의 모든 과정을 도맡아 온 멀티플레이어의 경험을 판매로 확장시켜 각자의 작품을 만들 듯 머리를 맞대어 행사를 만들었다. 올해 1월 초부터 우선 뜻을 같이 한 몇몇 작가들이 모여 행사명과 대략적인 방향을 정하고 9개월에 걸쳐 행사를 준비했다. 4월에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작가 미술장터 개설 지원사업’에 지원해 주된 자금을 마련하고, 8월에는 첫 부대행사로 ‘작가 및 미술인을 위한 저작권 특강’을 준비해 참여작가는 물론 저작권 문제가 첨예한 여러 분야의 생산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 행사 한 달 여 전부터는 공식 홈페이지(goods2015.com)에 참여 작가들의 ‘굿-즈’를 카탈로그 형식으로 싣고 인터뷰 및 텍스트를 업데이트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한 번 모이면 10~12 시간에 달하는 마라톤 회의가 다반사였고, 회의에서는 행사의 전체 방향은 물론 판매방식이나 개별 작가들의 구체적인 제작 기획을 함께 상세히 논의했다. 물론 이러한 내용 대부분은 <굿-즈>의 트위터 계정(@goods2015)과 여러 작가들의 꾸준한 트윗을 통해 공유되어 온 바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아트페어’가 아닌 <굿-즈>를 표방하는가? 아트페어는 이미 제도에서 인정받은 기성 작가들의 회화, 조각, 사진 등의 한정된 작품을 주로 판매한다. 작품의 구매자 역시 소수의 상류층 및 일부 애호가에 그친다. 아트페어뿐만 아니라 상업화랑과 옥션을 중심으로 한 기존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미술작품의 생산과 소비 모두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미술이 여전히 ‘고급 예술’에 머물러 있다는 엘리티시즘의 측면에서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지만, 끊임없이 미술장 안으로 생산자가 유입되는 가운데 생산자와 소비자의 비대칭 구조가 점차 심해진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시장이 발전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는 구조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미술시장도 변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생산자의 증가에 맞춰 소비자 역시 확대되어야 하고, 그러한 소비자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서는 판매될 수 있는 생산물의 스펙트럼 역시 넓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굿-즈>가 하려는 일은 바로 이러한 생산물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굿즈goods는 강한 팬덤을 보유한 만화, 애니메이션, 대중음악 등 서브컬처에서 특정 작가나 작품과 관련해 제작, 판매되는 피규어, 인형, 포스터, 티셔츠, 게임, 각종 팬시용품 등의 파생상품을 지칭한다. 그 종류만큼이나 가격대도 다양한 굿즈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력 안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템들을 구입해 소장함으로써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본인들이 서브컬처 굿즈의 소비자이기도 한 이들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술 영역에서도 굿즈의 방식이 통할 수 있을지 타진해보고자 한다. 이들 스스로 서로의 소비자가 되는 것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예술문화 생산자들과 예술과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잠재적 구매층으로 상정하고 그들이 굿즈를 소비하듯 현대미술의 소비를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상 예술과 삶의 통합을 중시하고 이미 원본과 사본, 작품과 상품의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은 현대미술 영역에서 굿즈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일상의 미학’을 강조한 영국의 문화연구가 폴 윌리스의 주장은 이에 힘을 더해준다. 그는 근대 이후 소수의 위대한 예술에 집중되었던 미학의 영역이 이제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문화(상품문화)의 생산 및 소비와 관련된 것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특정 예술이 문화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가 예술을 생성한다고 주장한다.6) 현대미술에서의 굿즈는 이러한 일상의 미학적 실천의 중요성을 반영하거나 각성하는 단면이 될 수 있다. 이번 <굿-즈>는 글자 사이에 하이픈(-)을 넣은 익살스러운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굿즈와 예술작품 양자를 아우르는 가운데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고 가볍게 현대미술의 구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드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는 듯하다. 또한 기존 시장에서 거래되어 온 전통적인 매체들 뿐 아니라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고정되지 않은 유무형의 현대미술 작업을 ‘굿-즈’의 형태로 새롭게 제작해 상품화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미술시장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효과 또한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목적이 실현된다면 이들 젊은 작가들과 신생공간에 재정적 도움을 줄 수 있을뿐더러, 생산과 소비가 보다 넓은 스펙트럼에서 이루어지고 삶과 예술이 좀 더 밀접하게 맞닿는 새로운 구조를 통해 미술시장은 물론 미술계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신생공간이 현 전시제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연적인 형태의 새로운 볼거리를 던져준 것처럼, 시장에서 역시 본인들의 생존을 위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기존 시장의 틈새에서 작용해 작게나마 정체된 미술시장을 활성화하는 일종의 대안적 움직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이들이 세대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이들 세대가 미술계를 대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트위터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동시에 본인 시각에 따라 구독자를 선택하는 까닭에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폐쇄성 또한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처럼, SNS를 기반으로 한 신생공간과 그 파생적 활동들도 세대를 중심으로 한 폐쇄성의 염려가 없지 않다. 자신들의 활동과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 미술계와 미술시장의 구조는 생각보다 공고할지 모른다. 트위터가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기존 매체들이 건재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트위터만의 고유성으로 기존 매체를 견제하거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고 있듯이, 우리의 미술계도 이들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가 기존 미술계 안에서 또 하나의 층위를 형성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보다 다양한 역학관계가 구축되기를 기대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주 대상으로 한 ‘브리즈 아트페어’와 상업화랑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작가들에게 수익금을 돌려주는 ‘SeMA 예술가 길드 아트페어’ 등 성격이 조금씩 다른 대안적 아트페어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다. 물론 다양성 측면에서 환영할 일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특히 <굿-즈>를 기대하는 이유는 작가들 스스로 행사를 주최하고 ‘굿-즈’라는 좀 더 유연한 형태의 생산물을 시도해본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7) 이 두 가지 차이는 사소해보이지만 사실 큰 차이가 될 수 있다. 기존 제도의 매개자들이 만들어놓은 판에 자신의 기존 작품을 내놓는 것과 달리, 생산자 본인들이 주체적으로 판매전략을 짜고 실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판을 만들어 경험해보는 것은 그야말로 ‘기대감소의 시대’에 생산자로서의 역량 자체를 키우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수 십 명의 작가가 제작한 수 백 종류의 작품과 ‘굿-즈’를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강점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수줍게 고백하자면, 시작도 전에 나는 평소에 눈여겨 본 몇몇 작가들의 ‘굿-즈’를 흥분에 찬 마음으로 기대하고, 또 미처 예상치 못했던 사고 싶은 것들이 있을까봐 은행잔고를 걱정한다. 그렇게 나는 <굿-즈>를 기다리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행복한 기다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각주 1) <트위터, 그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 아트인컬처 2010년 8월, 신혜영. 2) 이 글에서 그 구체적인 예를 모두 적시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으로 오픈베타공간 반지하의 프로젝트, 비디오릴레이 탄산의 상영회, 교역소의 <상태참조>와 <수정사항>, 구탁소의 <직업 X 예술>, 신생공간 세 곳에서 순차적으로 행해진 <던전>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 사진 분야로 특화한 지금여기와 공간291, 협소한 공간에 개인전 위주로 운영하는 합정지구와 기고자(운영자가 작가는 아니지만 여러면에서 신생공간의 성격을 공유한다), 일 년 단위로 기획자가 바뀌면서 전혀 새로운 기획들을 내놓기 시작한 아카이브 봄, 퀴어문화와 관련된 전시를 중심으로 한 청량엑스포, 일반인들을 위한 다양한 취미미술 클래스를 운영하는 스튜디오 파이, 작가들의 미술활동이 아닌 취미활동을 중심으로 한 미연씨 등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3) 아트인컬처는 2015년 7월호에 <젊은 ‘자생공간’ 뜬다>라는 제목으로 10페이지에 걸쳐 젊은 작가들이 운영하는 신생공간 24곳을 소개하고, 그중 8곳(교역소, 구탁소, 기와하우스, 신도시, 공간사일삼, 굿즈, 300/20, 조광사진관자립본부)을 인터뷰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기사화한 바 있다. 한편, 월간미술 역시 2015년 8월호에 특집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중 한국 현대미술 주요 연표 안에 2010~2015년 사이 새롭게 대두된 현상으로 ‘단색화 재조명’과 ‘신생공간’의 출현을 꼽았다. 커먼센터, 시청각, 교역소, 구탁소, 반지하, 800/40, 지금여기, 개방회로 8개의 공간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4) 공간사일삼, 괄호, 교역소, 구탁소, 굿즈, 미연씨, 비디오릴레이 탄산, 스튜디오파이, 시청각, 아카이브 봄, 인스턴트 루프, 지금여기, 커먼센터, 케이크갤러리, 합정지구, 물질과 비물질(황은정, 김종소리), 권순우, 손주영, 윤향로, 이수경, 조대원이 이번 행사를 함께 기획하고 준비했다. 5) 2014년 8월경부터 오픈한 굿즈에서는 이미 백경호, 이수경, 호상근, 강동주 등의 드로잉 액자, 윤향로/호상근의 포스트카드, 박현정의 뱃지, 김동희의 자수패치, 이수경/한진의 미소녀 메모리게임 카드, 이미래의 벽돌 조각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판매된 바 있다. 6) <Invisible Aesthetics and the Social Work of Commodity Culture>(2005), The Sociology of Art, New York : Palgrave Macmillan, Paul Willis. 7) 앞서 언급한 두 페어의 주최는 각각 에이컴퍼니와 서울시립미술관이며, 출품된 작품들의 매체나 양상도 기존의 아트페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글 신혜영 (미술비평) 편집 윤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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