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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 이전의 굿즈goods, 신생에 관한 주석들
‘굿-즈’ 이전의 굿즈goods, 신생에 관한 주석들



“굿-즈는 동시대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작업세계를 시각화하는 조형예술작가들이 작품과 소량제작된 에디션 및 작업의 파생물을 직접 판매하는 행사입니다.”-<굿-즈> 티저 페이지 발췌.

<굿-즈>가 개막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요즘, 국내 미술계는 일민미술관의 <뉴스킨>전을 끝으로 2015년의 상반기를 결산하는 듯한 분위기다. 특정한 기점을 눈금선 삼아 잘라낸 한 해의 복잡한 단층들을 일별해보는 일은 때로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뵈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의 향방을 모색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몇몇 지면들을 빌어 회고된 2015년의 상반기는 여러모로 세대교체에 대한 일종의 전초전처럼 읽힌다.

2014년에 처음으로 ‘신생’이라는 화두가 제기되었을 때와는 달리, 신생공간이라는 다소 불균질한 토대로부터 여타의 괄목할 만한 작업적 성과들이 불거져 나왔고 이러한 결과는 몇몇 주요 미술 일간지들에 의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조명의 어투에 담긴 호오와 별개로 어찌됐든 나름의 구체적인 대답들이 작업들과 보폭을 맞춰 불거지고 있다는 점은 불과 몇 달 새 신생이라는 과도한 허명이 어느덧 명백한 징후로써 인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굳이 <뉴스킨>이 상반기의 종착역 즈음으로 ‘회고’되는 이유는 (물론 시기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그러한 징후들이 마침내 미술관이란 제도공간에서 전시의 형태로 제시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회고의 방식과 별개로 여전히 신생, 혹은 신생공간이라는 프레임은 문제적이다. 이를테면 당사자들로부터 제기됐던 ‘신생’이라는 호명 자체의 부적절한 뉘앙스를 예시로 들 수 있겠다. 본격적인 담론화가 전개됐던 2014년 이전에도 분명 지금의 신생공간들은 설사 반드시 ‘공간’의 형태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꽤 다양한 양상으로 시도되거나 나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반드시 우리는 각자 축적해왔던 과거와 무관하게 굳이 신생이라는 무성의한 이름으로 단번에 호명되어야만 하는가? 이 자리에서 프레임 자체의 논리적 적합성을 논하는 것은 그리 적절치 못해 보인다. 문제는 이전이라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와 이후라는 ‘현재’ 사이의 낙차로부터 신생으로써의 어떤 변별점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이전의 시간을 무리하게 최대치로 되감아보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의 시공간에 도달하게 된다. 당시 1세대 유학파 작가들을 주축으로 형성된 대안공간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대표되는 신진작가들에 대한 일종의 인큐베이팅 구실에 주력했고 그로 인해 형성된 모종의 인적 네트워크를 동력 삼아 짧은 호황기를 누렸다. 대안공간과 신생공간이라는 명칭 사이의 유사성과 달리 앞선 세대의 공간 운영방식은 지금과는 판이하다. 전자가 제도로부터 선취했던 대안의 플랫폼이 당시 세계화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응하듯 급격하게 비대한 미술시장에 일정 부분 연동된 신진들의 입출구였다면, 후자는 대안공간의 전략이 제도에 의해 기꺼이 흡수된 이후 더 이상 선취할 만한 대안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촉발됐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러한 상황 이후 ‘발굴된’ 신진들 사이의 관계망은 기존의 미술계에 이전됨으로써 차단되었고 자체 프로그램을 상실한 제도 외부의 거점들은 고스란히 납작해졌다. “결국 이제 대안이란 없다”는 식의 비관적 전망이 2010년대라는 그늘진 시공간에 드리운 차양들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 이후의 진공상태에 이뤄졌던 단편적인 시도들은 앞서 언급했던 신생들의 미처 호명되지 못한 과거와 다름없다. 어찌됐든 몇 년 새보다 명확해진 것은 물리적 토대와 함께 상실된 (신진 이후의) 신생들을 둘러싼 교차범위로써의 감각이다. 불과 2014년까지만 해도 소위 미술계 차원에서 ‘우리’가 소급할 수 있는 공동의 경험이란 대안공간들과 더불어 가파르게 과거의 영역으로 분류된, 특정 세대 이후로는 결코 실제로 경험하지 못할 지면상의 사건들에 불과했다.

지금 시점에서 막 결산되고 있는 ‘신생’의 역학은 마치 그러한 역사적 빈 칸에 대한 반작용처럼 전개되고 있다. 이제 신생들의 작업 혹은 전시,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련의 활동들은 관객들 사이에서 일종의 문화적 경험으로써 작용한다. 이제 관객들은 공간 위에 인스턴싱1)된 순간에 자발적으로 헤쳐 모임으로써 신생이라는 헐거운 플랫폼을 기꺼이 지탱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결과는 축적되는 기억이라기보다 관객들 각자가 포착해 낸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SNS 상에서 두서 없이 공유되며 서로에게 점차 익숙해지는 식으로 가까스로 재확인되는 현존성의 감각에 가깝다.

이를테면 점유와 점거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유휴공간을 점거하는 식의 미술 이벤트는 과거 상황주의 작가들에게 일종의 도발적 행위로써 시도됐지만, 지금의 신생공간들이 점유한 유휴와 임대라는 공간적 성질은 물리적 전제조건에 가까우며 그것이 부조해 낸 전시공간으로써의 이질적 면모는 관객들에게 반복 경험됨으로써 점차 무뎌진다. 이제 신생공간과 그로부터 파생된 (느슨한 의미에서의) 공간특정적 작업들은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 없이 그 자리에 있거나 그 자리로부터 연성된다. 신생이라는 플랫폼은 일면 그런식으로 반복된 경험들의 총체다.

지금의 상황을 굳이 동인계로 비유하자면 SNS 상에서 벼려진 채 서로의 타임라인에 틈입하는 이미지들이 암시하는 ‘원본’은 실상 임대로 점철된 비루한 풍경이다. 신생작가들은 그 자체를 전유하거나 때로는 그 안에서 제시되기 위해 저화질의 (2차 창작된) 작업을 자처한다. 그리고 이는 과거의 낭만적 글로벌리즘과는 무관한 사회경제적 조건, 이를테면 청년들이 자립을 자처했을 때 자연스레 대면되는 빈곤이라는 총체적 경험과 미술 사이의 불균질한 접면인 동시에 실상 둘 사이가 형식적 차원에서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결국 특정 세대 이후의 미술가들은 그러한 보편적인 불모의 토대를 동적공간으로써 삼을 수밖에 없으며 그럴수록 청년 단위의 관객들은 스스럼없이 신생들에게 밀착되는 것이다. 이는 동류의 공간감(흡사 장르)에서 비롯한 유사 팬덤 문화나 다름없다.

이미 대개의 작업들은 정주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자리한 공간과 마찬가지로 실시간으로 벼려지는 처지에 있다. 이때의 벼려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임대로 구획된 공간이 그것이 한정된 시간에 종속되는 한 나날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 안에서 재생산되는 사건들이 SNS를 통해 재차 공유되며 벼려진 이미지들로써 나름의 외연을 넓힌다는 것이다. 이는 서로 상충하는 타임라인으로부터 비롯된 기묘한 신축성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불안정한 플랫폼을 연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물리적 토대를 잃어버린 상황을 애써 긍정하거나 의태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빈 칸’을 만회하기 위해 신생 주변에 헤쳐 모인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구성해낸 전략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생들의 작업은 굿즈로써 번역되기 이전에도 이미 작업과 대면한 경험으로써 서로 거래되거나 유통되는 처지다. 중요한 것은 <굿-즈>가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소비한 결과인 납작한 이미지-경험의 통로에 마침내 ‘마켓’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부여하고 이번에는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벼려낸 실물의 작업들로써 현실에 재차 파생시키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는 본격적으로 하위문화의 형식을 차용하는 동시에 앞선 예시들보다 한층 더 명확하게 원본 구실을 하는 개별 작업들을 지시한다. 스마트폰이라는 필터와 SNS가 가속하는 회전력에 의해 잠정적으로 분절했던 작업들은 이제 납작한 이미지로써의 지위에서 벗어나 현실의 표면 위에 새삼 굿즈들로 부조된다. 이로써 우리는 이제 작업에 관한 이미지들의 질감을 인식할 수 있게 됐다.

그 속에는 굿즈 이전의 개별 작업이라는 원본, 혹은 그것이 애초에 생산된 맥락이 담지하고 있는 일련의 속도들이 응축되어있다. 그러므로 굿즈가 실제 소비되는 풍경을 상상할 때 그 안에서 중첩되는 것은 어떻게든 접속의 순간을 가시화하기 위해 작가와 관객 양자 모두에게서 발현되는 내밀한 욕망이다. 앞서 언급한 신생들을 둘러싼 모종의 회전력은 신생이라는 윤곽을 유지하는 유의미한 관성인 동시에 축적되지 못한 이미지 경험들이 휘발됨으로써 ‘지금 여기’의 감각을 기꺼이 잃어버리는 퇴행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반면 굿즈는 관객들 각자가 거주하는 사적인 큐브에 비치되거나 유사 악세사리로써 휴대되는 식으로 동류의 공간감이란 장르를 한층 더 구체화시킨다. 각자의 일상에 삽입된 굿즈는 일면 미술계 청년들의 비루한 라이프스타일을 표상하는 오브제로써 기능하는 동시에 다시 ‘작업’으로써 재조립되기를 고대하는 파편들로써 어찌됐든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라는 감각은 신생들이 쉽사리 선취하지 못할 명제로 남아있다. 누군가 술회하듯 가깝고도 먼, 혹은 그러한 시간의 원근법조차 무색한 “무시간성”이 만연한 시대에 하물며 공동의 경험이란 때때로 일종의 착시처럼 여겨진다. 각자의 사적인 영역에 각인된 굿즈는 그러한 와중에 동세대 미술에 접속할 수 있는 한정적인 포탈 같은 것이다. 어찌됐든 관객들은 그것들을 간헐적으로 열람하며 신생과 한층 더 밀착될 것이다. 이는 공유된 문화적 기억이 부재한 현재의 개인들에 대한 일시적 처방임과 동시에 동류의 공간감으로부터 미술이 어떤식으로 각자의 일상에 점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이기도 하다. 물론 과거 대안공간과 마찬가지로 신생 또한 언젠가 화석화될 운명이라면 이는 얼마든지 예비된 과거에 대한 기념비들을 서로 나눠 갖는 다소 우울한 제의적 풍경으로 변모할 수 있다.

이로써 다시 회귀하는 질의는 이런 것이다. 어째서 신생공간은 굳이 인스턴싱되어야만 하는 가? 그 이유는 지도상에 산개한 좌표상의 공간들이 실상 공간의 형태로 가까스로 부조된 일시적인 경험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써 신생이란 화두와 대면하는 일은 그러한 광범위한 임대 경험을 그 안에 속한 일원으로써 구부리고 매만져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불안정한 플랫폼은 그러한 방식을 통해 재차 연장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직 각자의 방식으로 움츠리고 있는 굿즈들은 이제 곧 그 외부의 임대의 영역들로 유통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학이야말로 지금 당장 우리가 불완전하게나마 “선취한” 신생들의 교차범위다.



- 각주

1) 인스턴스란 주로 MMORPG에서 통용되는 공간의 단위로, 동시적으로 접속한 대규모의 플레이어들이 던전으로 상징되는 특정한 플레이 공간에 밀집됐을 때 발생하는 각종 과부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결과적으로 인스턴스-던전은 동일한 (혹은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을 소단위로 구성된 파티들에게 개별적으로 할당해주며, 일단 던전에 진입한 파티는 일시적으로 연성된 독립적인 공간에서 플레이를 진행하게 된다. 이러한 인스턴스 개념과 신생공간 사이의 연관성을 처음 제기한 글은 미생모 2차 자료집에 수록된 강정석의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이다.



글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편집 윤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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